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문단 편집) == 몰락 == 흔히 알려진 바로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대형 방화 혹은 파괴 사건으로 인해 책들이 다 [[분서]]되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잘 운영되고 있다가 한순간에 몰락해버렸다는 뉘앙스인데,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살펴보면 고대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파괴되었음을 말하는 기록은 다수 존재한다. 고대 로마 시절 카이사르, 아우렐리우스, 테오도시우스 황제 시대에 일련의 파괴 행위가 기록되어 있으며, 7세기 이슬람 세력이 알렉산드리아를 정복했을 때 도서관을 파괴했다는 기록[* 이 기록은 90년대 한국 [[EBS]]에서도 나와 이슬람 [[술탄]]이 여길 점령하자 이 도서관 책자는 [[쿠란]]에 안 맞으니 [[분서|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나왔었다. 642년 알렉산드리아가 이슬람에 점령되었을 때 도서관의 처분을 묻는 [[아므르 이븐 알 아스]]에게 “이 책들이 쿠란에 합치되는 가르침이라면 어차피 우린 무슬림이니 그런 책 굳이 더 갖고 있을 필요가 없고, 쿠란에 합치되지 않는 가르침이라면 우상숭배이고 이교도이니 없애버려야 한다”고 했다는 2대 정통 칼리파 [[우마르]]의 발언이 전해진다.]도 남아 있다. 단, 기록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13세기에나 이슬람교도들이 파괴했다는 내용이 담론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테오도시우스 1세]] 항목 참고]. 그래서 18세기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에 의하면 이슬람이 도서관을 파괴했다는 기록은 기독교의 프로파간다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게다가 각각의 자료에 기록된 파괴 정도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가장 유명한 것은 [[카이사르]]의 이집트 원정 시기에 기록된 대화재 기록이다. 플루타르코스, 겔리우스, 마르켈리누스, 오르시우스 등의 고대 역사가들은 이 당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커다란 화재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이집트의 장군이었던 아킬라스가 바닷길을 막으며 카이사르의 통신을 끊으려 하자 카이사르는 스스로 배에 불을 질렀는데, 이때 불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번져서 큰 화재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의도적인 방화는 아니고 카이사르의 실수였다는 말이다. 하지만 [[플로루스]]와 루카누스는 조금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에 화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불이 일어난 곳은 해변의 일부 가옥들 뿐이었다고 한다. 부분적인 소실 혹은 파괴가 아닌, 전체적인 파괴에 대해서는 현대 역사학계에서도 뚜렷하게 의견이 모아지지 않고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한 번의 거대한 사건이 일어나 도서관이 붕괴한 것이 아니라, 여러 번의 파괴 행위가 일어나면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후원하는 지역 왕조가 더 이상 복구 및 유지비용을 댈 수 없게 된 것을 주된 이유로 들고 있다.[* 도서관 파괴 행위가 일어났다는 것은 외부에서 쳐들어온 침략자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지역 왕조에서는 침략으로 인한 피해도 복구해야 했을테니, 당장 먹고 사는 문제와 직결되지 않는 도서관까지 지원할 여력은 모자랐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자금이 부족한 도서관은 점점 관리가 소홀해졌고, 학자들이 하나둘 떠나간 것에 의해 서서히 몰락했다는 것이다. 일단 도서관의 위치가 호수(마레오티스 호)하고 바다(지중해) 사이에 있어서 누군가 끊임없이 관리해주지 않으면 습기 때문에 문서가 쉽게 상하는 곳인데다 당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보관하고 있던 주요 자료들은 보존성이 낮고 대부분 화재나 습기에 취약한 [[파피루스]] 문서들이었다.자료를 지속적으로 관리하려면 반복적인 필사 작업이 요구되는데, 학자들이 떠나가면 이 작업을 담당할 사람이 없으니 자료가 소실되는 것이다. 물론 필사 작업 자체는 노예를 동원할 수 있지만 그들을 교육하고 작업을 검수하는것은 학자들의 담당이었다.[* 애초에 필사라는 일 자체가 최소한 글을 읽고 쓸 줄은 알아야 할 수 있는 일이기에, 문맹률이 높았던 전근대에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필사를 업으로 삼는 [[필경사]]들 중에도 글을 베껴쓸 수만 있고 읽어서 뜻을 이해할 수는 없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도서관에 머물며 업무를 보던 수많은 학자들은 지역 왕조의 후원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도서관 유지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이 끊긴다면 도서관의 몰락은 자연스러운 결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위의 글은 반드시 파괴가 외적으로 인해 생기진 않았을 것이라는 점[* 이러한 주장은 이슬람교도들이 침략해 도서관이 파괴되었다는 주장에서 나온 주장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까 내부에서의 파괴를 고려하지 않았다. 또 도서관이 당대인들에게 크게 인식되어야지 도서관 후원의 중요성이 생기는데, 후원이 안 되었다는 것은 도서관이 그만큼 영세해졌다는 것을 나타낸다는 사실 또한 간과한다. 즉 도서관의 완전 파괴가 아니라 당대인들에게 인식의 정도가 큰 도서관을 영세한 도서관으로 만든 파괴를 고려하지 않았다. 당대인들의 지적이 많았던 테오도시우스 1세 시절과 위의 서서히 도서관이 사라졌다는 주장을 합해 고려해보면 도서관이 갈수록 영세해져서 후원할 중요성이 떨어졌고, 이로 인해 서서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다. 641년에 알렉산드리아를 함락한 이슬람의 장군 암르 이븐 알 아스가 641년, 지하드를 진행하면서 도서관을 끝장내버린 건 사실이지만[* 당시의 [[칼리프]]는 [[우마르]]였는데 초기 선출 칼리프 시대의 칼리프들은 대개 호학에 개방적인 마인드를 가진 뛰어난 군주들이었지만, 하필 우마르만은 예외였다.], 그 이전부터 도서관은 이미 파괴되고 있었다고 [[5세기]]의 신학자 [[파울루스 오로시우스]]는 적고 있다. 이런 식의 파괴라면 한순간에 파괴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라는 이미지가 나온 이유, 그리고 이슬람교도들의 파괴라는 이미지가 나올 수 있는 환경, 마지막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장이 테오도시우스 1세 시절에 있었다는 역사적 맥락 모두 충족시킬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